벌써 10년이 흘렀다. 2013년 7월 10일 오후, 한국 여자 골프 선구자 구옥희가 우리 곁을 조용히 떠났다. 일본 시즈오카현 누마즈시의 한 골프연습장에서 조카의 스윙을 봐주던 구옥희는 몸이 좋지 않다며 인근 숙소로 자리를 옮겼다. 숙소로 돌아간 뒤 조카에게 전화를 걸어 “돌아오면서 포도를 사 오너라”라고 했지만, 구옥희는 포도를 입에 대지 못했다. 조카가 숙소로 돌아갔을 때 구옥희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사인은 급성심근경색. 우리 나이로 58세였다.

경기 후 일본 미디어와 인터뷰하는 구옥희. 쑥스러운 듯 환하게 웃는 모습이 시선을 끈다. (사진=㈜에스에스 제공, 관광레저신문 DB)
경기 후 일본 미디어와 인터뷰하는 구옥희. 쑥스러운 듯 환하게 웃는 모습이 시선을 끈다. (사진=㈜에스에스 제공, 관광레저신문 DB)

 

무뚝뚝함, 고집스러움, 어눌한 말투. 내게 구옥희는 썩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구옥희를 제대로 공부하고 취재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내 안에서 굳어진 편견이 녹아내린 건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일본 골프와 구옥희를 취재하면서다. 구옥희와 생전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구옥희의 인생을 진중하게 들여다보니 구옥희만큼 성공해서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고 사랑받은 골프선수는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다간 영웅이었다.

구옥희의 성공 이면에는 세 명의 은인이 있다. 구옥희의 인생을 큰 틀에서 내려다보면 갈림길마다, 고비마다 은인이 나타난다.

이야기는 1978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한국에서 프로로 데뷔한 구옥희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국내 여자 골프를 집어삼켰다. 국내 여자 프로골퍼 1세대 중 구옥희에 견줄 만한 선수는 없었다. 1979년 10월 쾌남오픈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뒤 이듬해인 1980년 열린 5개 대회를 전부 우승했고, 1981년 첫 대회 쾌남오픈까지 7개 대회 연속 우승이라는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그래도 빈손이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 여자 골프는 투어 시스템이라는 말을 꺼내기도 민망한 환경이었다. 대회라고 해봐야 1년에 3~5개를 치르는 것이 고작이었고, 상금도 없었다. 여자 프로골퍼를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 않았다.

구옥희는 ‘국내 무대는 너무 좁다’라는 이유로 프로 데뷔 후 줄곧 일본 진출을 꿈꿨다. 일본은 1970년대에도 여자 프로골프 투어 시스템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대회와 상금도 많았고, 선수에 대한 예우도 좋았다. 히구치 히사코(樋口久子)처럼 세계 무대에서 이름을 널리 알리던 선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꿈의 무대였다. 구옥희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가 일본 무대를 동경했다.

하지만 가고 싶어도 갈 방법이 없었다. 당시 일본 비자는 일부 특권층이 아니면 받기 어려웠다. 준비해야 할 서류도 많고 복잡해서 일본어를 모르고 연고도 없는 한국인이 혼자의 힘으로 일본에 갈 순 없었다. 더구나 프로골퍼처럼 일본에 장기 체류하면서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사람에겐 일본인 신원보증인이 필요했다.

그렇게 한해 한해 아까운 시간이 흘러갔다. 일본 진출은 요원한 꿈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요야마 마사오(豊山昌男)라는 재일교포가 구옥희를 찾아온다. 한국 이름은 홍두창, 신한은행 1대 주주이자 교토에서 유통 관련 사업을 하던 재력가였다.

당시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에는 투 아이유(涂阿玉)라는 대만 선수가 맹활약하고 있었다. 일본에선 도 아교쿠라고 불렀다. JLPGA 투어 통산 58승을 올리면서 7번이나 상금왕에 오른 대선수였다.

홍두창은 구옥희처럼 실력 있는 한국선수가 일본에서 뛰길 바랐다. 그는 구옥희와 마주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람은 손재주가 좋으니 골프도 잘할 거다. 일본에는 외국 선수가 많은데 한국선수는 없어서 아쉬웠다. 내가 일본 진출을 돕겠다.”

구옥희와 다카무라 히로미 그룹 친구들. 1991년 5뤟 6일 니가타현에 1박 2일로 놀러 가서 찍은 사진. 가운데가 그룹의 호스트 다카무라 히로미, 바로 옆에 구옥희가 있다. 이 사진만 보더라도 그룹 내 구옥희의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사진=관광레저신문 DB)
구옥희와 다카무라 히로미 그룹 친구들. 1991년 5뤟 6일 니가타현에 1박 2일로 놀러 가서 찍은 사진. 가운데가 그룹의 호스트 다카무라 히로미, 바로 옆에 구옥희가 있다. 이 사진만 보더라도 그룹 내 구옥희의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사진=관광레저신문 DB)

 

구옥희에겐 눈이 번쩍 뜨이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홍두창의 말을 100% 신뢰할 수는 없었다. 홍두창 이전에도 ‘일본 진출을 돕겠다’라면서 구옥희를 찾아온 재일교포가 여럿 있었다. 일본 진출을 돕겠다던 사람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면 연락이 끊기고 말았고, 그때마다 실망감만 쌓여가고 있었다. 휴대전화도 이메일도 호출기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연락 주겠다던 사람이 연락을 주지 않으면 별다른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홍두창은 구옥희와의 약속을 지켰고, 구옥희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그렇게 일본 진출을 도운 홍두창이 구옥희 인생을 바꾼 첫 번째 은인이다.

구옥희가 일본 무대에 데뷔한 건 1982년 5월이다. 도쿄요미우리컨트리클럽에서 열린 월드 레이디스 골프 토너먼트가 데뷔 무대다. 한국 여자골프 역사에 남을 첫 해외 원정이자 위대한 역사의 서막이었다.

그러나 구옥희는 여전히 불안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더 답답했다. 가진 돈도 없었다. 운동 외에도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당장 먹고 자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때 일본 진출을 도운 홍두창이 구옥희를 데리고 나카히라토 마치코(中平五等真知子)라는 사람에게 찾아간다.

나카히라토는 도쿄 JR 야마노테선 에비스역 근처에서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던 여성 사업가였다. 골프와는 무관한 일을 했으나 구옥희 이야기를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사사로운 것까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구옥희의 신원보증인이자 매니저이자 가족이 되어주었다.

구옥희는 일본에 처음 진출했을 때부터 1986년 미국 진출 전까지 나카히라토의 집에서 먹고 자는 것을 해결했다. 나카히라토는 구옥희의 경기 외적인 업무들을 맡아서 해결해주었다. 사실상 구옥희의 최측근이었다. 그의 사무실에는 지금도 구옥희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가 구옥희의 두 번째 은인이다.

구옥희가 사망하자 일부에선 “일본여자프로골프협회 발전에 이바지했으니 협회장으로 치러야 한다”라는 목소리도 들렸다. 충격에 휩싸인 일본 골프계는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다. 이때 신원보증인이던 나카히라토가 “한국으로 보내주는 것이 옳다”고 말하면서 교통정리가 되었고, 시신은 냉동 보관된 채 한국으로 운구되었다.

구옥희를 떠나보낸 나카히라토는 자비로 구옥희 추모 행사를 준비했다. 장례식이 한국에서 치러져 생전 가까이 지냈던 다수의 일본인이 구옥희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보기 위함이었다. 추모식은 도쿄 미나토구 쉐라톤 미야코 호텔에서 열렸고, 부조나 화환 같은 건 일절 받지 않았다. 그의 구옥희에 대한 진정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구옥희의 세 번째 은인은 다카무라 히로미(高村博美)라는 선수다. JLPGA 투어 통산 8승을 올렸고, 1990년 상금왕에 오른 일본 여자골프 레전드 중 한 명이다.

당시엔 매니지먼트가 없는 대신에 비공식적인 소속이 있었다. 함께 운동하고 밥 먹고 함께 시합장에 다니는 조직이었다. 호스트의 이름을 따서 ○○그룹이라고 불렀다. 서로 레벨이 비슷하고 마음에 맞는 선수들끼리 모여서 낙오되거나 소외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는 선수가 없도록 서로 돕는 일본식 패거리 문화였다. 2000년 이후 선수마다 에이전시가 붙으면서 대부분 사라졌으나 최근까지 우에다 모모코(上田桃子) 그룹이 존재했던 것으로 안다.

구옥희는 다카무라 히로미 그룹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그러면서 많은 신세를 지게 된다. 대회장을 찾아다니는 것, 교통, 식사, 투어 정보까지 다카무라 히로미 그룹 친구들이 꼼꼼하게 챙겨준 덕에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일본어를 못했을 뿐 아니라 일본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전혀 없었던 구옥희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구옥희도 다카무라 히로미 그룹 친구들에게 잘했다. 우승이라도 하면 전원 한국으로 초청해 여행을 시켜주기도 했다. 모든 경비는 구옥희가 댔다.

다카무라 히로미는 구옥희의 인간성을 좋아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았고,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렸지만, 구옥희를 얕잡아보거나 의심하는 일은 없었다.

구옥희는 말보다 행동이 앞섰다. 한마디 한마디에 진중함이 녹아 있었고, 지키지 못할 약속 따위는 일절 하지 않았다. 말이 아닌 마음으로 친구를 사귀었다. 다카무라 히로미도 그런 구옥희를 극진히 챙겼다. 만약 구옥희에게 다카무라 히로미가 없었다면 정글과도 같았던 일본 사회에서 운동에만 전념하기는 어려웠으리라. 구옥희를 향한 이지메(괴롭힘을 뜻하는 일본어로 일본 사회의 저속한 문화 중 하나) 공격이 난무하던 시기였다. 〈[구옥희 10주기②]〉에서 계속.

 

  오상민

  스포츠ㆍ레저 칼럼니스트

  관광레저신문 편집인

  신사우동 호랑이 대표

  『일본 열도를 뒤흔든 한국의 골프 여제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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