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옥희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0년대 초반 한국 여자골프 1세대 선수들(내가 ‘일본 열도를 뒤흔든 한국의 골프 여제들’이라는 책에서 정의한 건 1991년까지 일본에 진출한 선수들)이 일본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일본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무시와 차별은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었다.

(사진캡션)구옥희의 특기는 뭐니 뭐니 해도 아이언샷이었다. 아이언으로 목표 지점에 정확하게 떨어트려서 컴퓨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진=㈜에스에스 제공, 관광레저신문 DB)
구옥희의 특기는 뭐니 뭐니 해도 아이언샷이었다. 아이언으로 목표 지점에 정확하게 떨어트려서 컴퓨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진=㈜에스에스 제공, 관광레저신문 DB)

 

일본에서 구옥희의 별명은 컴퓨터였다. 아이언샷을 워낙 정확하게 쳐서 붙은 별명이었다. 당시는 컴퓨터가 보편화하기 전이었으니 지금이었다면 ‘알파고’라는 별명이 붙지 않았을까 싶다. 페어웨이 위에 놓인 공은 말할 것도 없고, 러프처럼 좋지 않은 곳에 공이 떨어져 있어도 핀에 정확하게 붙여서 버디나 파를 만들어냈다. 경기를 잘 풀어가던 경쟁자들이라도 구옥희의 한 치 오차도 없는 플레이를 보면 스스로 무너져내기 일쑤였다.

문제는 퍼트였다. ‘아마추어 수준의 퍼팅’이라는 혹평을 들을 만큼 퍼트가 서툴렀다.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기록 시스템이 갖춰진 1990년 이후 구옥희의 라운드당 평균 퍼트는 38위, 파온 홀(정규 타수 이내로 그린에 올린 홀) 평균 퍼트는 14위가 최고 기록이었다. 일본에서만 통산 23승을 올린 대선수의 퍼트 실력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더구나 구옥희는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밥을 먹고 잠자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시간을 골프에 매달렸다.

1985년 일본으로 건너간 김애숙은 “(구옥희 선배는) 시합 끝나면 연습그린에서 매일 2~3시간씩 머리도 들지 않고 퍼트 연습을 했다. 연습으로라도 구옥희 선배를 이겨보고 싶어서 옆에 붙어 악착같이 퍼트 연습을 했는데 내가 따라가지 못할 연습량이었다”라고 기억했다. 1992년 일본 무대에 데뷔한 신소라는 “집에서도 퍼터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늘 퍼팅을 잘하기 위해 연구했지만, 퍼트 실력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신소라는 한때 일본에서 구옥희와 같은 집에서 살며 골프 스윙과 트레이닝을 배우기도 했다.

퍼트 자신감이 부족했던 것일까. 퍼트 시 어드레스가 길어지면서 슬로플레이어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구옥희에 대한 이지메(괴롭힘을 뜻하는 일본어로 일본 사회의 저속한 문화 중 하나) 공격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도 슬로플레이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다. 퍼팅할 때마다 어드레스가 길어지면서 여러 선수 입방아에 올랐다. 구옥희 면전에서 불편한 속내를 드러낸 선수도 있었다. 슬로플레이를 빌미로 구옥희를 인신공격하는 선수도 있었다. 구옥희에 따르면 경기위원들도 자기편이 아니었다. 일본 선수들과 공정한 잣대로 룰을 적용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의 노골적인 이지메 공격에도 구옥희는 물러서거나 기가 죽지 않았다. “나는 룰을 위반하지 않았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경기했을 뿐이다”라면서 맞받아쳤다. 일본어가 능숙하진 않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충분히 했다. 강단 있고 소신이 뚜렷했으며 늘 패기로 넘쳐흘렀다. 일본인들은 구옥희의 패기에 한 발짝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구옥희가 일본인들의 노골적인 이지메에도 당당할 수 있었던 건 다카무라 히로미(高村博美) 그룹 친구들 덕이었다. 당시 다카무라 히로미 그룹에는 통산 8승의 상금왕(1990년) 출신 다카무라 히로미를 비롯해서 통산 20승으로 두 차례나 상금왕에 오른 시오타니 이쿠요(塩谷育代), 통산 17승 다카스 아이코(高須愛子), 통산 15승 야스이 준코(安井純子), 통산 6승 기도 후키(城戸富貴) 같은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 선수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어벤저스 그룹이 따로 없었다. 누구라도 다카무라 히로미 그룹 선수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활동했던 한국선수들의 이지메 경험담은 흔하지 않다. 젊은 선수일수록 이지메를 당해본 경험이 전혀 없거나 “골프선수들 사이에 이지메는 없다”라며 주장하고 옹호하는 사람도 많다. 무엇이 진실일까. 구옥희는 대체 무엇을 겪은 것일까. 시대적인 문제였을까.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어느 정도 개선은 되었겠지만, 내가 아는 일본 여자골프에는 지금도 이지메가 만연하다. 아니 일본 사회에서 이지메가 없는 조직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럼 “골프선수들 사이에 이지메는 없다”라고 주장하고 옹호하는 사람들은 무엇일까. 이지메에 대한 이해 부족이 원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지메와 왕따는 다르다. 왕따는 ‘집단 따돌림’이고, 이지메는 일본어 ‘괴롭히다’를 뜻하는 동사 ‘이지메루’의 명사형 ‘괴롭힘’이다. 집단 따돌림뿐만 아니라 개인이 개인을 괴롭히고, 이간질하고, 짓궂게 장난치고, 말을 함부로 하는 행위도 전부 이지메다. 왕따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왕따는 이지메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사진캡션)1991년 5월 6일 다카무라 히로미 그룹 친구들과 니가타현에 1박 2일로 놀러 갔다 찍은 사진이다. 평소 골프만 알던 구옥희에게 여행 가서 찍은 사진은 희귀한 자료다. (사진=관광레저신문 DB)
1991년 5월 6일 다카무라 히로미 그룹 친구들과 니가타현에 1박 2일로 놀러 갔다 찍은 사진이다. 평소 골프만 알던 구옥희에게 여행 가서 찍은 사진은 희귀한 자료다. (사진=관광레저신문 DB)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내 이야기를 해보겠다. 나는 1990년도에 일본 유학을 갔다. 학교 다니며 라면집에서 아르바이트했다. 그곳엔 하마다(浜田)라는 선배가 있었다. 나이는 모른다. 키는 나보다 작았고 얼굴은 큰 편이었다. 날 싫어했던 선배였기에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이름도 인상도 잘 잊히지 않는다. 날 싫어한 이유는 김치 냄새 때문이었다. 냉장고에 넣어둔 김치통에서 냄새가 나서 다른 음식을 넣을 수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래서인지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잔소리가 심했다. 주말 아침인데도 시끄럽다는 이유로 세탁기를 돌리지 못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일 아침에 먹으라’면서 큰 주먹밥 두 개를 만들어주었다. 주먹밥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으나 일본 주먹밥을 실제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늘 배고팠던 시절이었기에 모양은 중요하지 않았다. 고마운 마음으로 맛있게 먹었다.

다음날, 점장(점주)이 나를 따로 부르더니 “주먹밥 어땠냐?”고 물었다. 난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점장은 “진짜? 너 이지메당한 거야”라며 웃어댔다. 주먹밥이 상식적이지 않게 크고 짭짤하긴 했으나 그것이 이지메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마다는 내게 먹지 못할 주먹밥을 건네면서 골탕 먹일 심산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난 돌도 씹어서 소화시킬 나이였기에 하마다의 소심한 이지메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렇듯이 한국인은 일본 사회에서 이지메를 당해도 모르고 넘어가는 일이 많다. 얼마 전 JTBC 골프의 토크 프로그램 ‘클럽하우스’ 안신애 편에 패널로 출연한 적이 있다. 안신애는 녹화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고로 아래 내용은 편집되어 방송에 나가지 않았다.

“일본에 처음 갔을 때 고바야시 (히로미 JLPGA) 회장이 날 인정해주지 않는 느낌이었다. 이제 나도 같은 식구(일본여자프로골프협회 소속)인데, 자꾸 외부인 대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날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나를 인정하지 않는 건지 모르겠는데….”

이 역시 이지메다. 같은 무리에 속에 있어도 인정해주지 않거나 외부인 대하듯 하는 행동도 전부 이지메다. 대회장에서 갤러리들이 이유 없이 야유하고 험담하는 행위도 이지메다. 이지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런 야비한 행위는 1~3년간 계속된다.

구옥희는 추잡하고 비인간적인 이지메 공격에 노력과 끈기와 실력으로 맞섰다. 무엇보다 다카무라 히로미 그룹 친구들이 뒤를 봐주고 있었다. 다카무라 히로미 그룹이 모든 한국선수의 뒤를 봐주지는 않았다. 다카무라 히로미 그룹에 속한 한국인은 구옥희가 유일했다. 언어적, 문화적인 문제로 외국인을 받는 걸 꺼려 했기 때문이다. 구옥희는 예외적으로 다카무라 히로미에 간택된 인재였다.

구옥희 주변엔 늘 다카무라 히로미 그룹 친구들이 있었다. 시합장에 함께 다니면서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운동했다. 그래서 같은 한국선수라도 구옥희와 가까이하기는 쉽지 않았다. 2~3세대 후배 선수들에게는 하늘처럼 높은 존재였다. 개중에는 그런 구옥희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도 있었다.

구옥희가 후배들을 차갑게 대하거나 무관심했던 건 아니다. 낯을 심하게 가리고 말수가 적었으며 표현이 서툴러서 쉽게 오해받는 성격이지만, 영락없는 정 많은 한국인이었다. 1985년 일본에서 미즈노와 후원 계약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후배들에게 일일이 미즈노 골프 장갑을 선물한 일도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 막 프로골퍼 생활을 시작한 이영미(현재 한국여자프로골프투어 대표)도 구옥희의 미즈노 골프 장갑 선물을 받은 후배 중 한 명이었다. 이영미는 귀한 선물을 함부로 쓰지 못하고 골프연습장 개인사물함에 보관해두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장갑은 누군가의 나쁜 손에 의해 사라지고 말았다.

이영미는 1987년 통일교계 기업 일화의 후원을 받고 일본에 진출하게 된다. 일본 진출 후 구옥희와 재회하면서 선물 받은 미즈노 골프 장갑 도둑맞은 이야기를 꺼냈는데, 구옥희는 말없이 온화하고 상긋한 눈웃음만 보였다고 한다. 구옥희는 눈빛으로 “괜찮아. 그딴 장갑 내가 얼마든지 더 사줄게”라고 말하고 있었다. 〈[구옥희 10주기③]〉에서 계속.

 

오상민

스포츠ㆍ레저 칼럼니스트

관광레저신문 편집인

신사우동 호랑이 대표

『일본 열도를 뒤흔든 한국의 골프 여제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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