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어느 날이었다.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의 한 대회 연습 라운드가 한창이었다. 후배 김만수와 같은 조에서 플레이하던 구옥희는 무관심한 듯하면서도 후배의 스윙과 플레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김만수는 1985년 일본에 둥지를 튼 1세대 선수 중 한 명이다. 구옥희를 존경했고, 연습밖에 몰랐다. 키가 작았고, 몸이 말랐으며, 짧은 비거리가 약점이었다. JLPGA 투어에서 통산 1승을 거뒀다. 구옥희는 성실한 김만수를 신뢰해서 연습 라운드를 함께하곤 했다.

라운드 중 구옥희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몸 쓰는 스윙을 해봐. 넌 지금 팔로만 친단 말이야. 그러니 거리가 나겠어?”

김만수는 구옥희의 꾸지람을 들은 척도, 듣지 않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플레이에만 집중한 채 아무런 말도, 대꾸도 하지 않았다.

비거리는 김만수의 큰 약점이자 콤플렉스였다. 작은 몸이 짧은 비거리의 원인 중 하나였으나 어릴 적부터 체계적인 스윙을 배우지 못한 것이 더 컸다. 김만수뿐만 아니라 당시 1세대 선수들은 자수성가하며 스스로 골프를 익힌 탓에 스윙을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익힌 스윙은 프로골퍼가 되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구옥희는 그런 김만수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연습 부족이야. 더 연습해.”

구옥희는 김만수가 오랫동안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도 똑같은 말을 했다. 그때마다 김만수는 아무런 말도 대꾸도 하지 못했다.

구옥희는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시간 외에는 모든 시간을 골프 연습하는 데 할애했다. 모든 것을 지독한 연습으로 돌파했다. (사진=㈜에스에스 제공, 관광레저신문 DB)
구옥희는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시간 외에는 모든 시간을 골프 연습하는 데 할애했다. 모든 것을 지독한 연습으로 돌파했다. (사진=㈜에스에스 제공, 관광레저신문 DB)

 

2세대(내가 ‘일본 열도를 뒤흔든 한국의 골프 여제들’에서 정의한 건 1992년부터 일본에 진출한 한국선수들) 기수 신소라는 한때 구옥희와 같은 집에서 살았다. 구옥희의 메인 후원사이자 신소라의 서브 후원사였던 L&G(건강 관련 제품을 판매하던 일본의 유통회사)가 사택을 제공해 함께 지냈다. 도쿄 와세다대학교 인근 고급 맨션이었다. 월세가 40만 엔이나 했다. 구옥희와는 방을 따로 썼으나 몹시 불편한 동거였다.

구옥희는 평소 TV를 전혀 보지 않았다. 불필요한 가구는 아예 집에 두지도 않았다. 생활에 똑 필요한 것들만 놓어서 큰집이 텅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쉬는 날도, 쉬는 시간도 없었다. 잠을 자고 밥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모든 시간을 골프 연습하는 데 할애했다.

식사 시간과 휴식 시간도 골프의 연장선이었다. 골프 이외엔 다른 어떤 취미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결혼도 하지 않았다.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 무대 진출 후에도 따로 만난 남자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골프는 그의 인생 모든 것이었다. 함께 살던 신소라에게는 이런 말을 자주 하며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강요했다.

“남들 쉴 때 다 쉬고 남들과 똑같이 하면 어떻게 남들보다 잘할 수 있겠어.”

그러나 당시 스무 살을 갓 넘긴 엑스 세대(1965~1976년에 태어난 세대) 신소라는 골프에 매몰되고 싶지 않았다. 시합과 연습 외 시간에는 누구에게 어떤 강요도 받고 싶지 않았다. 골프 외에도 취미 생활을 즐기면서 자신만의 특별한 인생을 즐기고 싶었다.

구옥희는 허락하지 않았다. 경기력이 좋아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대회 결과와 부진한 성적도 전부 연습이 부족한 탓이라며 신소라를 질타했다. 아파도 쉬지 못했다. 프로골퍼인 이상 아픈 것도 핑계라고 했다. 신소라가 경기를 망쳐 침울해 있을 때는 “네 손모가지로 친 것 아니냐”며 강하게 꾸짖었다.

구옥희는 연습에 대한 신념이 누구보다 강했다.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모든 것을 연습으로 극복하면서 꿈을 이뤘다. 연습으로 뛰어넘지 못할 벽은 없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연습만을 강요했다.

한장상은 자신의 자서전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에 구옥희를 ‘독사 근성의 수제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책에는 “연습량이 엄청났다. 남자 프로도 못 따라갈 정도의 맹훈련을 했다. 나의 젊은 시절 연습량을 웃돌았다”라고 게재되어 있다.

이렇게 악착같은 훈련과 인내력으로 한국 여자골프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구옥희지만, 정작 국내 언론에는 모질고 야박한 평가를 받았다. ‘성공한 프로골퍼였으나 결코, 행복하지 않은 인생’이라는 국내 다수 미디어와 기자들의 평가가 그것을 대변한다.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않았고, 프로암에서는 도시락을 싸와 식사를 따로 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프로암은 프로골프대회 전에 열리는 중요한 이벤트다. 프로골퍼와 아마추어가 짝을 이뤄 경기한다. 아마추어는 주로 대회 스폰서나 관계자가 참가한다. 프로암에 출전한 프로골퍼는 스폰서들과 함께 라운드하고 식사하며 발전적인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얻는다. 대회 성적만큼이나 중요한 과정이 아닐 수 없다. 프로골퍼로서 프로암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도시락을 싸서 따로 먹을 생각은 하지 못했을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건의 결과만을 확대해서 해석했을 뿐이다. 기사에는 과정과 목적과 배경이 생략되었다. 한 명의 독자로서 구옥희가 프로암에서 왜 도시락을 싸가서 따로 먹었는지, 늘 그랬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남는다. 기사는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고, 이유를 막론하고 구옥희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몰고갔다. 누구라도 구옥희의 대인관계와 원만하지 않은 성격을 꾸짖을 만하다. 나 역시 그랬다.

구옥희 추모식 앨범. 앨범 첫머리에는 2005년 최고령 우승 기록을 수립한 뒤 시상식에서 했던 말이 적혀 있다. “기술과 체력이 있으면 나이는 상관없다. 후배들 긴장하시라. 나는 아직 현역입니다.” (사진=관광레저신문 DB)
구옥희 추모식 앨범. 앨범 첫머리에는 2005년 최고령 우승 기록을 수립한 뒤 시상식에서 했던 말이 적혀 있다. “기술과 체력이 있으면 나이는 상관없다. 후배들 긴장하시라. 나는 아직 현역입니다.” (사진=관광레저신문 DB)

 

그러나 나는 구옥희의 프로암 도시락이 구옥희의 건강 이상징후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일본 여자골프와 구옥희의 흔적을 따라다니면서 구옥희가 선천적인 소화장애를 앓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평소 위장이 좋지 않아서 음식을 마음 놓고 먹지 못했다. 고기를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되는 기름기는 전혀 먹지 않았다. 소고기(특히 안심부위)와 패킹덕(베이징 오리구이) 같은 소화가 잘 되는 것만 골라 먹었다. 낯선 음식은 절대 먹지 않았다. 사망 몇 개월 전 애제자 신소라와의 마지막 식사에서 먹었던 음식도 유황오리였다.

술은 아주 조금만 마셨다. 따뜻한 사케(일본 술의 총칭)를 작은 잔으로 3분의 1만 따라 마셨다. 찬 맥주는 전혀 마시지 않았다. 술을 못했던 건 아니다. 차가운 술이 몸에 들어가면 위장에 해롭다고 생각해서인지 최대한 절주하려 했다. 절주는 평생 실천했다.

운동선수에게 몸은 재산이다. 몸이 망가지면 모든 것을 잃는다. 선수 수명도 그것으로 끝이다. 운동선수로서 몸 관리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즉, 구옥희의 자기관리는 비난이나 비아냥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칭찬과 존경의 대상이어야 한다. 설령 자기관리가 지나치다고 해도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나무랄 일도 아니다.

프로암에서 낯선 음식과 마주하고 당황했을 구옥희를 생각해보시라. 자기관리에 소홀할 수 없는 프로골퍼 입장을 조금만 이해했다면 구옥희의 프로암 도시락과 같은 비아냥 섞인 기사는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구옥희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으리라.

사실 난 운동선수로서 구옥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한국 여자골프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건 틀림없으나 현대 스포츠가 요구하는 선수는 아니라는 게 내 판단이다. 현대 스포츠가 요구하는 트렌드 중에서 선수와 대회 주최사, 스폰서, 에이전시 등에 공통으로 요구되는 것이 스포테인먼트다. 과거처럼 경기력만으로 흥행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난 지 오래다. 경기력에 오락성이 가미해야 깊고 넓은 팬층을 오랫동안 확보할 수 있다. 선수는 플레이어이자 하나의 상품으로서 흥행성을 갖춰야 한다. 그런 면에서 구옥희를 비롯한 모든 1세대 선수는 현대 스포츠 트렌드와는 동떨어진 선수생활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운동선수 조건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도 나는 구옥희를 한국 여자골프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는다. 개인적인 취향을 떠나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으로 구옥희를 바라보면 한국 여자골프의 선구자라는 타이틀은 구옥희의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한국 여자골프의 시작으로서 전성기로 가는 징검다리를 놓았으며, 국내 골프산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이다. 만약 구옥희가 없었다면 한국 여자골프 발전은 10년 이상 늦어졌을 것이라는 게 오랫동안 구옥희를 취재하고 연구하며 공부하면서 내린 무거운 결론이다.

구옥희가 일본에 정식으로 데뷔한 건 1984년이었다. 구옥희가 일본에 성공적으로 데뷔하며 맹활약하자 일본 골프계는 이전에 없던 이례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1985년 2월 일본 이바라키현 야이타컨트리클럽 관계자와 언론사 기자들이 육사 골프장(지금의 태릉 골프장)에 모였다. 〈[구옥희 10주기④]〉에서 계속.

 

오상민

스포츠ㆍ레저 칼럼니스트

관광레저신문 편집인

신사우동 호랑이 대표

『일본 열도를 뒤흔든 한국의 골프 여제들』 저자

저작권자 © 관광레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