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골프계의 한국 상륙작전은 대한골프협회 사전 공지를 통해서 알려졌다. 일본 도치기현 야이타컨트리클럽에서 일본여자프로골프협회(JLPGA) 프로테스트를 목표하는 한국인 연수생을 선발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골프계가 한국에서 연수생을 선발하겠다고 밝힌 건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85년 2월, 그들은 왜 자국인 일본도 아닌 한국 땅에서 프로골퍼 연수생을 선발하기 위해 대대적인 원정에 나선 것일까.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선 1982년 JLPGA 투어에 첫선을 보인 구옥희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구옥희는 누가 뭐래도 한국 여자골프의 선구자다. 그러나 현실은 조금 다르다. 구옥희를 알지 못하는 다수의 대중은 박세리만 안다. 박세리는 잊힌 영웅 구옥희를 대신해 선구자라는 수식어까지 얻었다. (사진=㈜에스에스 제공, 관광레저신문 DB)
구옥희는 누가 뭐래도 한국 여자골프의 선구자다. 그러나 현실은 조금 다르다. 구옥희를 알지 못하는 다수의 대중은 박세리만 안다. 박세리는 잊힌 영웅 구옥희를 대신해 선구자라는 수식어까지 얻었다. (사진=㈜에스에스 제공, 관광레저신문 DB)

 

구옥희는 1984년 정식으로 JLPGA 투어에 데뷔하면서 인상적인 플레이를 펼쳐 보였다. 데뷔 첫해 구옥희가 남긴 기록은 8차례 톱10 진입에 상금순위 13위였다. 함께 데뷔한 한명현, 강춘자, 정길자와 비교하면 도드라지는 기량이었다.

이미 구옥희의 존재를 알고 있던 일본인들이었지만, 예상 밖 선전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골프 변방 한국에 구옥희 같은 선수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데뷔 첫해부터 내 집에서 플레이하는 것처럼 안정적이고 대담하게 경기하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한국 사람은 손재주가 좋으니 곧 일본을 따라잡을 것”이라며 구옥희의 일본 진출을 도운 재일동포 도요야마 마사오(豊山昌男ㆍ한국명 홍두창)의 예견이 한 치 오차도 없이 딱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선견지명이 없었다면 구옥희는 물론이고 한국 여자골프 발전도 더디게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구옥희의 예상 밖 선전에 일본 골프계는 비상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에 구옥희 같은 선수가 더 있을지 모르니 일본이 나서서 발굴해 육성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홍두창을 비롯한 재일교포들이 “한국에는 구옥희처럼 잠재력 있는 선수가 아주 많다”라는 말을 자주 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일본 사회는 거품경제 속에서 해외 투자에 거침없이 눈을 돌리고 있었다. JLPGA는 폐쇄적이면서도 글로벌 투어를 지향하는 미묘한 이중성을 보였다. 아시아의 선도국가로서 유망주를 조기 발굴ㆍ육성한다는 오지랖을 보인 것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 유망주를 발굴해 일본에서 프로로 데뷔하게 했다.

아시아 유망주 조기 발굴ㆍ육성 프로젝트에 가장 먼저 뛰어든 곳이 야이타컨트리클럽이다. 한국에서 오디션을 열어 잠재력 있는 선수를 직접 선발ㆍ육성하겠다고 발표했고, 오디션 장소는 육사골프장(지금의 태릉골프장)으로 결정되었다. 당시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일본 16개 언론사 기자들이 방한해 오디션 심사를 봤다. 사실상 구옥희 효과였다.

오디션에 참가한 한국인은 36명이었다. 대한골프협회 공지를 통해 참가 신청한 선수가 대부분 이었고, 일부는 지인의 추천이나 소개로 응시하게 되었다. 오디션 참가 계기는 달랐으나 모두가 재팬 드림을 꿈꾸고 있었다. 오디션이라고 해봐야 드라이버로 공을 몇 개씩 쳐보는 정도였다. 대부분 기본기가 없어서 제대로 된 스윙을 하지 못했는데, 장타를 날린다는 이유로 선발되기도 했다. 응시생 36명 가운데 김만수, 김애숙, 김선화, 이영귀가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곧바로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일본은 한국보다 골프 환경이 월등히 좋았다. 훌륭한 선수와 지도자도 많았다. JLPGA 투어는 1968년 출범해 숫자상으론 우리보다 10년이 빨랐으나 실제론 20년 이상 앞서갔다. 우리 선수들의 눈에 비친 일본은 파라다이스였다. 어딜 둘러봐도 깨끗했고, 질서연정했다. 투어 시스템은 물론이고 여자 골프선수에 대한 처우나 예우도 좋아서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일본 야이타컨트리클럽 연수생으로 선발된 4명의 한국선수. (사진=KPS 제공, 관광레저신문 DB)
일본 야이타컨트리클럽 연수생으로 선발된 4명의 한국선수. (사진=KPS 제공, 관광레저신문 DB)

 

4명의 한국선수는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프로테스트까지는 길지 않았지만, 독하게 매달리면서 합격을 간절히 염원했다. 오전 6시부터 체력 훈련으로 일과를 시작했고, 9홀 라운드 후 어프로치 연습을 했다. 밤늦게까지 트레이닝과 스윙 연습을 이어갔다. 훈련은 늦은 밤까지 끝나지 않았다. 골프장 업무를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더 고단한 일과였다.

이들의 훈련 과정은 일본 스포츠지에 대서특필되면서 일반에 알려졌다. 4명의 한국선수가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뿌연 입김을 내품으면서 체력훈련하는 사진도 실려 있었다. 신문 기사를 접한 일본인들은 일본이 아시아의 선도국가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봄이 되었다. 푸른 잔디가 올라왔고, 벚꽃이 피었다. 이를 악물고 훈련에 매달렸던 4명의 한국선수는 테스트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김만수와 김애숙은 프로테스트에 합격해 JLPGA 투어 진입에 성공했으나 김선화와 이영귀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만수와 김애숙은 기쁜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김만수는 1987년 9월 일본 미야기현에서 열린 미야기TV컵 여자오픈 골프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면서 연수생 신화를 썼다. 유난히 우승과 인연이 없던 김애숙은 1998년 오키나와현 류큐골프클럽에서 열린 시즌 개막전 다이킨 오키드 레이디스 골프 토너먼트에서 프로 데뷔 14년 만에 감격의 우승컵을 들었다. 그후 일본에서 골프해설위원으로, 골프선수 에이전시로 활약하면서 제 2의 전성기를 누렸다.

일본의 거품경제와 맞물린 구옥희 효과는 기업 투자까지 이끌어 냈다. 한국여자프로골프투어(KLPGT) 대표 이영미가 구옥희 효과의 최대 수혜자라 할 수 있다.

이영미에게 기회가 온 건 1987년이다. 통일교회계 기업이자 식품ㆍ음료 제조업체 일화의 후원을 받으면서 JLPGA 프로테스트에 응시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땐 대부분 선수가 일본 진출을 꿈꿨지만,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국내 대회 우승 경험이 없는 신인급 선수였던 이영미가 엄청난 몸값으로 일본행 비행기를 타게 된다. 이영미가 일화로부터 받은 계약금은 연간 600만 엔이었다. 1980년대 후반 웬만한 대회 우승상금이었다. 당시 일본의 경제ㆍ사회적 상황을 고려해도 파격적인 대우였다.

계약은 매년 같은 조건으로 갱신되었다. 무려 18년간 계약이 이어졌다. 일화 내부에서도 이영미의 파격적 계약 조건에 반발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1992년 기분 레이디스 클래식에서 첫 우승하면서 오랜 스폰서 조건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영미가 JLPGA 투어에 데뷔한 1988년 일본에선 연간 37개(메이저 대회 3개 포함) 대회가 치러졌다. 이벤트(비공인) 대회 10개를 포함하면 총 47개 대회가 열렸다. 선수들은 대회를 골라서 출전했다. 다시 없는 호황이었다.

구옥희가 일본에 성공적으로 데뷔하지 못했다면 한국 여자골프 발전은 10년 이상 늦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에스에스 제공, 관광레저신문 DB)
구옥희가 일본에 성공적으로 데뷔하지 못했다면 한국 여자골프 발전은 10년 이상 늦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에스에스 제공, 관광레저신문 DB)

 

역시 일화의 후원을 받은 김정수는 이영미보다 1년 늦은 1988년 JLPGA 프로테스트에 합격했다. 이렇게 완성된 것이 일본 진출 1세대(내가 ‘일본 열도를 뒤흔든 한국의 골프 여제들’에서 정의한 건 1991년까지 일본에 출진한 선수들)다. 구옥희 효과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구옥희가 없었다면 한국 여자골프 발전은 10년 이상 늦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박세리가 사과나무에 열매를 맺게 했다면 구옥희는 텃밭에 씨를 뿌렸다. 무에서 유를 창출했고, 없던 산업을 일으켜 한국 여자골프 전성기로 가는 탄탄한 징검다리를 놓았다. 구옥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업적이다.

그런데도 구옥희가 대중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건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다수의 언론 기사에선 구옥희가 한국인 처음으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우승(1988년 3월)했을 때 서울올림픽을 앞둔 시점이어서 이슈가 묻히고 말았다고 논평했으나 구옥희에 대한 우리 언론의 무관심은 1988년 이전에도 이후에도 똑같았다. 서울올림픽 때문에 구옥희가 대중에 알려질 기회를 잃었다는 주장은 논리가 빈약하고 허술하다.

내 논리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골프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편견이다. 당시 골프장은 스포츠ㆍ체력단련시설이라기 보다 정치ㆍ경제 거물들의 비즈니스 전장에 가까웠다. 폐쇄적이고 은밀해서 골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다. 우리나라 선수가 해외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해도 공개적으로 상을 받지 못했다. 대표적인 선수가 한장상이다. 1972년 일본오픈에서 우승했으나 박정희는 국민 시선과 눈높이를 고려해 표창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스포츠로 마케팅하던 시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구옥희에겐 가족도, 스폰서도, 매니저도, 스윙 코치도 없었다.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국내 기업 후원이 없었으니 언론사도 따라서 움직이지 않았다. 구옥희 기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완벽한 혼자였다.

반면에 박세리는 삼성의 후원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SBS에선 박세리와 LPGA 투어를 독점 생중계했고, 온 국민이 열광했다. 박세리는 훌륭한 선수이자 좋은 상품이었다. 영웅이라는 화려한 날개를 달았고, 잊힌 구옥희를 대신해 선구자라는 수식어까지 얻었다. 지금은 구옥희에 의한 박세리 시대다. 〈끝〉

 

오상민

스포츠ㆍ레저 칼럼니스트

관광레저신문 편집인

신사우동 호랑이 대표

『일본 열도를 뒤흔든 한국의 골프 여제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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